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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태어나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아빠와 어린 나를 기둥에 묶어 두고 집을 나가서 자살한 엄마. 우리 집의 가정사는 주위 어른들에게 항상 가십거리가 되었다. “불쌍한 진희, 저 어린 것을 잘 거둬 먹여야 할 텐데.” 나의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일찍 철이 들고 나서부터 나의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 상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학교가 끝나면 그래도 공부를 좀 한다는 애들 무리는 영어 학원으로, 수학 학원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반면 다니는 학원도 딱히 없고 피씨방에 가기에는 돈이 궁한 애들이 우리 집의 만화방으로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는 수준 낮은 애들과 같이 히히덕거리면서 만화를 보기도 싫고, 명색이 엘리트인데 체면을 지키고 싶어서 공부방에서 조용히 문제집을 펼친다. 엘리트라고 하는 집단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끊임없이 긴장하며 예지의 칼날을 벼려놓아야만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남에게 관찰 당하는 것을 싫어해서 숨기는 법을 터득했지만 무방비상태로 떠드는 애들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나는 그들의 비밀에 접근한다. 비밀이란 절대 보이기 싫어하는 것 만큼이나 누군가에게 공유되어지기를 간청한다. 마침 장군이는 만화책을 보다 말고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며 상기된 얼굴로 옆에 앉은 친구에게 속삭인다. 옆 자리 친구 역시 실실 번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며칠간의 장군이의 행실을 통해 장군이가 실은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친구에게 속삭이는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바보같은 장군이는 오늘도 나에게 비밀을 저당 잡혔다.

발등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요 몇 달 동안 느껴 본적이 없는 낯선 간지러움에 펜을 놓고 발등을 내려다봤다. 웬 검은 물체가 발 위에 올라와있었다. 자세히 보니 셀 수 없이 많은 다리로 내 발등 위에서 종아리를 넘어 허벅지까지 오르려고 하는 커다란 벌레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발을 크게 움직여서 벌레를 털어버릴까 생각했지만 징그러움을 강요하는 벌레에게 굴복 당하기가 싫었다. 난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뱉어버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 벌레를 낱낱이 관찰했다. 한참 동안 인내하며 벌레를 지켜본 결과 징그럽다는 느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벌레는 징그러움의 대상에서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난 그것을 손으로 덥석 집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밤이 늦어 애들은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드레스룸에 진열된 옷들을 정리했다. 여름이 되었으니 짧은 원피스를 더 사서 걸어놓을지, 반바지를 사서 걸어놓을지 잠깐 고민하다가 비싸 보이는 원피스를 걸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3층으로 올라가서 오늘 입은 옷들을 세탁기에 던져놓고 침실에 갔다. 벌레를 극복하고 얻은 성취감에 기분이 들떴다. 그러다 문득 행복과 불행은 순서대로 온다는 것을 잊은 채 들뜬 기분에 취해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의 이완이 언짢아졌다. 한숨을 푹 쉬고 침대로 향했다.